- 2014년 1월 10일 전남대 국문과 신해진 교수가 번역해서 책을 출간했는데, 소장자증정용으로 3권을 받았습니다.
머리말
전라남도보성(寶城)이라 하면 ‘녹차고장’으로서 다향(茶鄕)의이미지를 먼저 떠올릴 것이고, 박유전(朴裕全,1835~1906)이 창제하고 정응민(鄭應珉,1896~1964)이 전수한 ‘보성 판소리 고장’으로서 예향(藝鄕)의 이미지를또한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오랑캐라 여겼던 이민족들의 침입에 따른 국난을 당했을 때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던 ‘의병 고장’으로서 의향(義鄕)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보성의 의병활동은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 고경명이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자, 장흥의 문위세, 능주의 김익복 등과 함께 보성의 박광전, 임계영 등이 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모집하여 보성관아에서 전라좌의병을 결성하였다. 곧, 의병대장 임계영, 종사관정사제, 양향관(糧餉官) 문위세, 참모관 박근효 등으로 진용을 갖추었다. 이들은 경상도 개령(현 김천시)과 성주까지 진출하여 왜적과 싸우는 등 크나큰 전과를 올렸다. 정유재란 때는 충무공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 되어 보성에서 8일간머물렀는데, 이순신의 장인 방진이 보성 군수이기도 하였다. 보성의조성(鳥城)·득량(得粮)을 거쳐 열선루(列仙樓)에서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이나 남아 있고,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습니다.(尙有十二, 微臣不死.)”라는 비장한 장계를 올렸는데, 보성의 최대성이 아들과 가노(家奴)까지총동원하고 수많은 의병을 모아 그 휘하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이순신이 재기하여 승전고를 올리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끝내 이순신은 “만약 호남이 없었으면 나라가 없었다.(若無湖南, 是無國家)”고 하였다. 그리하여박관전, 소상진, 정사제,임계영, 최대성 등 많은 보성사람들의 의로운 발자취가 고정현에 의해 1799년 편찬된 《호남절의록》에 수록되어 있다.
정묘호란때는 안방준이 보성의 의병 수백 명을 이끌고 전주로 향했으나, 화의가 이루어져 의병을 해산하고 돌아왔다. 당시 양호 호소사(兩湖號召使) 김장생이조정에 아뢰어 안방준을 의병장으로 삼았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도 안방준은 64세의 노구를 이끌고 “나라를 위해 죽는다면 매우 다행한 일이겠노라.”는 격문을 도내의 여러 고을에 보내어 수백 명의 의병을 모아 이끌고 여산에 이르자, 남한산성의 항복 소식을 듣게 되어서 통곡하고 돌아왔다. 이처럼, 외침을 당하여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할 때면, 보성은 어김없이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고자 일어났던 의향이다.
이 책은바로 1636년 병자호란 때 안방준(安邦俊)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던 당시의 조직과 구성원들을 처음으로 기록하여 엮은 《우산선생 병자창의록(牛山先生丙子倡義錄)》을 번역하고 주석한 것이다. 이 문헌은 1780년에 간행한 초간본이다. 초간본은 목활자본으로 10행 23자 1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표제와 판심제 모두 ‘병자창의록’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초간본에 김종후가 쓴 서문을 보면, ‘우산선생 병자창의록’이라하였다는 언급이 있기 때문에 다른 문헌과 구별 짓기 위하여 이를 책명으로 사용하였다. 이 초간본은 영남대학교도서관과 안세열 씨만 소장하고 있다. 반면, 초간본이 간행된지 80여 년이 지난 1864년에 중간한 것이 《은봉선생병자창의록(隱峯先生丙子倡義錄)》이다. 이 중간본은 목활자본으로 10행20자 1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표제는 ‘은봉선생창의록’으로 판심제는 ‘은봉창의록’으로 되어 있으며, 비교적 많은 곳에 소장되어 있는 판본이다.
이번 《우산선생병자창의록》 번역작업에서는 두 측면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간 학계에서 초간본의 소장처는 드문 반면, 중간본의 소장처는 비교적 많았기 때문에 중간본을 인용 자료로 거리낌 없이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일까. 초간본과 중간본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고려하여 인용하여야만 인용의 적절성과 가치성을 담보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초간본과 중간본을 서로대조하고, 변개된 모습이 어떠한지 빠짐없이 기술하였다. 더불어이 책에는 그러한 변개양상을 주목하고 살핀 역주자의 글이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2013년 국어국문학회제56차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을 보충하여 『국어국문학』164호에게재했던 논문이다.
다음으로는보성을 중심으로 한 의병들이 ‘국난을 맞아 목숨을 걸고 구국의 깃발아래 모일 수 있었던 근원적인 동력이무엇이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의 실마리를 풀고자 한 것이었다.1762년 간행된 《호남 병자창의록》(신해진 역주, 태학사, 2013)을 보면, 17개 지역에 걸쳐 106명의 의병들의 사실이 등재되어 있고, 10명 이상의 의병이 등재된고을은 광주와 영광 두 곳뿐이다. 반면, 《우산선생 병자창의록》은 7개 지역에 걸쳐 196명이 등재되어 있는데, 다른 향촌에서는 그 유례를 쉬이 찾아볼 수 없는 100여 명이 넘는숫자의 의병이 보성이라는 한 고을에서 의병진에 참여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궁금증을 풀기위한 일환으로 문헌의 등재 인물들에 대한 친가 및 처가와 외가 관계를 찾을 수 있는 데까지 조사하였다. 각문중의 족보 기록 내용이 부실한 면이 없지 않아 완전하지 않지만 조사 결과를 보건대, 혈연과 혼인을통해 형성된 끈끈한 인적 유대망이 보성 지역에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라가 위급할 때 구국의깃발 아래로 모일 수 있었던 자발적 동력의 구체적 요인이 무엇인지 살필 수 있는 자료를 부족하나마 정리한 셈이라 하겠다. 보다 심도 있는 논의의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임진왜란때에는 비록 상처뿐인 승리였을지라도 상하민이 합심하여 일구어내었지만, 병자호란 때에는 국난을 맞아 그항쟁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도 못한 채 참혹하고도 치욕스런 패배에 이르자 탄식하고 은둔한 당시 의병들의 모습에서 가슴 먹먹함을 느끼게되는 이 책을 상재하니, 대방가의 질정(뛰어난 학자들이 꾸짖어바로잡음)을 청한다.
《우산선생병자창의록》에 수록된 의병들의 친가 처가 외가 등만 아니라 생몰년 8자리를 확인하기 위한 작업도 병행할때에 인터넷, 각종 대동보와 파보 등을 두루 참고하였으며, 게다가각 문중 관계자들의 따뜻한 후의(厚意)를 입었다. 그 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말 못할 곡절을 겪으며 난관에 부딪혀 있는 나에게 초간본을 영인할 수 있도록 승낙해 주신 안세열 어르신께 고개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바이다. 끝으로 편집을 맡아 수고해 주신 보고사 가족들의 노고에도 심심한 고마움을 표한다.
갑오년(2014) 1월 빛고을 용봉골에서
눈 덮힌무등산을 보며 신해진
병자 창의록서(丙子倡義錄序)
우산(牛山) 선생 안방준(安邦俊)은 정묘년(1627)과 병자년(1636)에오랑캐가 쳐들어왔을 때 모두 의병을 일으켜서 국난에 나아갔지만, 다 화의(和議)가 이루어져서 곧 해산해야 했다.
지금 그병자년에 창의할 때의 서약한 글 및 부서와 인원 등을 기록한 책이 어떤 집안에 보관되어 있으니 책의 이름은 ‘우산선생병자창의록(牛山先生丙子倡義錄)’이었다. 선생의 후손과 거의자(擧義者)들의자손이 판각(板刻)하여 간행하기로 하고, 나 김종후(金鍾厚,1721∼1780)에게서문을 부탁하였다.
나 김종후는삼가 펼쳐 읽어보노라니 마치 당시의 일을 목격이나 하듯이 두려운 마음을 품었는데, 한결같은 충성과 장한마음은 천년이 지난 뒷날에도 사람들을 감동케 할 만한 것이었다. 이어서 의거가 여러 번 떨쳐 일어났을때마다 번번히 화의(和議)에 의해 실패하게 된 것을 애통해하였는데, 나도 이에 수천 리 우리 강토가 원수인 오랑캐에게 짓밟혔던 것을 애통해 하였다.
지금 백여년이 되었어도 이 창의록은 어찌 뜻있는 선비들의 눈을 거듭 부릅뜨게 하지 않을 수 있으랴. 또한 선생의훌륭한 공업(功業)과 의로운 풍채는 후학들이 잊지 않고 칭송하며우러르는 바이니, 비록 보잘 것 없는 글일지라도 차마 민멸케 할 수는 없는 것이거늘, 하물며 이 창의록에야. 이로써 서문을 삼는다.
숭정 3번째 기해년(1779) 11월
청풍 김종후(金鍾厚)가 삼가 서문을 짓다.
발문(跋)
지난 병자년(1636)의 변란 때 오랑캐 기병들이 왕성(王城: 도성 곧 한양) 가까이 들이닥치자,대가가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피란해 들어갔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뜻 있는 선비라면 누군들적개심으로 국난에 달려갈 뜻이 없었으랴. 나의 선조 우산공(牛山公: 안방준)은 피눈물을 쏟으면서 비분강개하다가 의병을 모집하여 근왕(勤王)하기로 하였는데, 고을의 100여 명과 맹세를 다지고 의병 일으키기를 약속하여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서 동지들을 규합하고는 밤낮으로달려가 완산(完山: 전주)에이르렀으나,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일의 대강은 선생이 기록한 초안에 간략히 실려 있으나, 그 계획과지시 사항들의 상세함을 엿볼 수가 없었다.
우리 고읠의후생들은 이에 대해 늘 개탄하였는데, 마침 본읍(本邑)의 향교 장서각(藏書閣) 안에서당시 의리를 맹세했던 완의(完議), 동참했던 사람들이 서명한명첩(名帖) 및 부서와 인원을 기록한 문건 등을 찾아내고펼쳐 읽어보았다. 그나라를 위한 충성심과 울분이 격앙된 말씀에 나도 모르게 머리털이 곤두서고, 계속해서 눈물이 떨어졌다. 또 맹세를 다진 제현(諸賢)들은 모두 우리 고을의 어르신들이었다. 여러 사람의 이름을 기록한 인명록은 한 분 한 분 빛났고, 군율이엄정하였다. 국난에 용감하게 달려가는 기세는 늠름하여 나약한 자를 일으켜 세웠다. 또한 여러 고을의 제공(諸公)들은격서의 소식을 듣고 일제히 일어나 바람처럼 달려오고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니, 어찌 충의에 서로 감응하여그런 것이 아니었겠는가. 의병은 오래되지 않고 곧바로 해산하여 비록 풍성하고 아름다운 공적을 세우지는못했지만, 그 충성스러운 마음과 의로운 용기만은 천하 후세에 드러날 것이었다. 이 거룩한 기세와 아름다운 공적을 전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100여년이 되었으니, 무릇 떳떳한 성품을 지닌 자라면 팔 걷어붙이고 애석해 하지 않을 수 없거늘, 하물며 그 자손이 된 자임에랴.
이에 창의록의후예들과 뜻을 합하였는데, 다 같이 간행하여 길이길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서리(胥吏, 관청의하급 관리)나 기수(旗手)의천한 사람도 충분을 충분을 분발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그 마음은 또한 매한가지이니, 부서(部署)의 반열(班列)에 아울러 기록하여 오래도록 후세에 점할 계획으로 삼았다.
이어서붙일 말은 “충성스럽고 의로운 성품은 인간이면 본디 지닌 것이니, 어찌지난 시절에만 아름답고 후세에서는 아름답지 않으랴. 오직 바라노니, 창의록의모든 후손들은 각기 선조의 충의가 격렬했음을 생각하여 가문의 명성을 지키는데 스스로 힘쓰도록 하라.”이다.
숭정기원 3번째 경자년(1780) 2월
안방준선생의 5대손 안창익(安昌翊)이 삼가 발문을 쓰다.
안방준(安邦俊)
조선시대 『이대원저』, 『삼원기사』, 『기묘유적노랄수사』등을 저술한 학자.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峰)·우산(牛山)·빙호(氷壺). 보성 출신. 아버지는첨지중추부사 안중관(安重寬)이며, 처는 경주 정씨로서 판관 정승복(鄭承復)의 딸이다. 안중돈(安重敦)에게 입양되었다.
박광전(朴光前)·박종정(朴宗挺)에게서 수학하고, 1591년(선조 24) 파산(坡山)에 가서 성혼(成渾)의문인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광해군때 이이첨(李爾瞻)이 안방준의명성을 듣고 기용하려 했으나 거절하였다.
1614년(광해군 6) 보성 북쪽 우산(牛山)에들어가 후진을 교육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교유가 깊던 공신 김류(金瑬)에게 글을 보내, 당쟁을 버리고인재를 등용하여 공사의 구별을 분명히 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앞서 서인계 정철(鄭澈)·조헌(趙憲)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일찍부터 서인편에 서게 되었다. 일찍이 성리학에 전념하여, 호남 지방에서 명성을 떨쳤다. 지기(志氣)가 강확하고절의를 숭상하여 정몽주(鄭夢周)·조헌을 가장 숭배하였으며, 이들의 호를 한자씩 빌어 자기의 호를 은봉이라 하였다.
인조 초에 동몽교관(童蒙敎官)·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정묘·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켰다. 조헌을 추모하여 『항의신편(抗義新編)』을 편찬한 바 있다. 서인의 이귀(李貴)는 이를 인간(印刊)하고, 중외에 반사(頒賜)할것을 인조에게 건의하였다.
인조 후반에 전생서주부·찰방·좌랑등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거듭 상소하여 시정(時政)을 논했으나 현실과 부합되지 않은 내용이 많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효종이왕위에 오르자 좌의정 조익(趙翼)이 천거하여 지평(持平)·장령(掌令)·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효종 초에 지방의 유일(遺逸)주 01)을 초치 등용하려 했을 때, 선우협(鮮于浹)·최온(崔蘊)·조극선(趙克善)·권시(權諰)·이유태(李惟泰) 등과 함께 천거되었다. 1652년(효종 3) 지평으로 있을 때, 김자점(金自點)에게 보낸 왕복 서찰이 있다 하여 변명하는 상소를 하였다.
그 해 5월 효종에게 상소하여 대동법(大同法)을 반대하면서 김육(金堉)을 선조대의 유성룡(柳成龍)에비유하며 비난하였다. 80평생을 주로 초야에서 보내면서 시종 성리학에 침잠했으나 학문적 경향과 처세·처신에 있어서 상기(尙氣)주 02)의 병폐가 있었다. 일찍이 정철·조헌·성혼 등 서인계 인사를 추종한 데서 정치적 성향은 서인편에 섰다.
인조반정의 공신인 김류·이귀와 비공신계인 성문준(成文濬)·송준길(宋浚吉) 등과 친교가 있어, 서인 집권 하에서는 호남 지방을 대표하는 학자로조정에 거듭 천거되었다. 보성의 대계서원(大溪書院), 동복의 도원서원(道原書院), 능주의도산사(道山祠)에 제향되었다.
1691년(숙종 17) 호남인 정무서(鄭武瑞) 등의소청으로 안방준의 사우(祠宇)가 한때 철거되었다. 그리고 정철과 함께, 서인과 남인 정권의 소장(消長)에따라 포폄되기도 하였다. 안방준의 시문은 『은봉전서』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편저로 『항의신편』·『이대원전(李大源傳)』·『호남의병록(湖南義兵錄)』·『삼원기사(三寃記事)』·『사우감계록(師友鑑戒錄)』·『혼정편록(混定編錄)』·『매환문답(買還問答)』·『기묘유적노랄수사(己卯遺蹟老辣瀡辭)』 등이 있다. 이러한 편저는 의병사·당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